[이 아침에] 88세 할머니의 덕질
한국의 동생이 카톡을 했다. 가수 임영웅이 필리핀에서 상을 받는데 엄마가 거기에 가고 싶어 해서 고민이란다. 동생은 아이들 방학을 맞아 취소할 수 없는 여행계획이 있다나. 개인 콘서트라면 나라도 한국에 나가 모시고 가겠지만 수상식이라니 노래 한두 곡 하는 것이 다일 텐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핑계를 찾는다. 동생에게 부모님 시중을 떠맡겨 온지라, 마음이 개운치 않다. 콘서트에 몇 번 가본 후 엄마의 덕질은 시작됐다. TV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란다.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피케팅(피가 튀는 전쟁터와 같이 치열한 티케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컴퓨터 속도로는 어림도 없고 광속을 자랑하는 피시방에서 ‘피케팅’을 해야 한다. 서울에서 표를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조금 수월해서 LA공연 표를 구해 다녀가셨다. 암표 살 돈이면 우리도 만날 겸 미국에 오는 게 훨씬 경제적이란 계산이다. 가수의 팬클럽 ‘영웅시대’에서 나온 하늘색 후드티를 입고 행여 깨질까 여러 겹 조심스레 싸 온 응원봉을 꺼낸다. 응원봉은 공연장 필수 아이템이라 비싸지만 계속 사용할 테니 샀단다. 평생 엄마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우리는 깔깔 웃었다. 거울을 보며 희미한 눈썹을 새로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후 공연장인 코닥극장으로 갔다. 엄마는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돌볼 만큼 건강하지만,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다. 등도 굽고 쪼그라든 엄마에게 세월이 보여 안쓰러웠는데, 덕질을 시작하며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힘들어하던 스마트폰 사용도 가수의 팬이 되면서 금세 익혔다. 여러 유튜버에게 얻은 정보를 지치지 않고 부지런히 전한다. 노래 실력도 좋지만, 예의 바르고 성품이 훌륭하다고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일찍 혼자되어 고생하며 외아들을 키운 가수의 엄마와 가수가 대견하고 애틋하단다. 나이 들며 재미있는 일도, 감동할 일도 줄고 매사에 시큰둥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엄마를 보면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하다. 아버지 떠난 빈자리를 손주 나이의 가수가 채워서 허전함을 위로받는다. 누구보다 사리 분별 명확하고 이성적이던 엄마의 뒤늦은 덕질이 당황스럽다. 나는 팬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흔하던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여본 적 없고 하다못해 연예인 얼굴을 코팅한 책받침도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BTS의 인기곡이 무엇인지 멤버가 몇 명인지 당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메마른 내가 비정상인가. 내가 몰두할 열정과 호기심은 어디 있을까. 세월은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열정과 흥미를 잃을 때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항상 뜨거운 응원과 격려로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주던 씩씩한 엄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디 아프지 말고 계속 영웅이를 벗 삼아 오래도록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최숙희 / 수필가이 아침에 할머니 덕질 가수 임영웅 평생 엄마 스마트폰 사용